제2차 랜드 대전 | 랜드 전쟁 第二次ランド大戰 | 大戰爭 Second Land War | The Hot War of Land | ||||
기간 | 1973년 7월 14일 ~ 1977년 7월 27일 (종전 후 D+17989) | |||
장소 | 랜드해협 전역 (라 마베라·체르드·유고랜드·청평 및 인근 해상) | |||
원인 | 라 마베라·체르드의 공산화와 마베라 내전 냉전 구도의 파국적 격화와 안보 딜레마 해상 교통로·자원권을 둘러싼 이권 분쟁 민족주의·이념 대립의 군사적 충돌 국지전의 연쇄 확전으로 '콜드 워'가 '핫 워'로 전환 | |||
교전국 | 연합국(자유진영) | 동맹국(공산진영) | ||
지휘관 | ||||
병력 |
|
| ||
결과 | 북부·남부 전역: 연합국의 승리 체르드·라 마베라 공산 정권 붕괴, 오로아 휴전협정 동부 전역(청북전쟁): 군사적 교착 바젤 정전협정 | |||
영향 | 랜드해협 질서의 재편과 봉쇄선 확정 해르샤바 조약기구 창설과 해협 남북 대치의 고착 체르드의 중립화와 라 마베라의 왕정 복귀 일부 국가의 체제 불안정 심화 및 내전성 분열의 씨앗 루이나 중심의 연합국 패권 강화 및 군사동맹 고착화 | |||
피해규모 | 사망 약 3,146,280명 부상 약 6,021,940명 실종 약 642,310명 총 사상자 9,810,530명 | 사망 약 3,889,770명 부상 약 6,777,430명 실종 약 821,540명 총 사상자 11,488,740명 | ||
1. 개요 [편집]
2차 랜드 전쟁(第二次ランド大戰, Second Land War)은 1973년 7월 14일부터 1977년 7월 27일까지 랜드해협 전역에서 루이나를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의 연합국과 사비에트·청평을 비롯한 공산진영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제2차 랜드 대전이라고도 하며, 냉전이 실제 전쟁으로 번졌다는 뜻에서 핫 워(The Hot War of Land)라고도 불린다.
전쟁은 한 곳에서 시작되어 차례로 번졌다. 1972~1973년 체르드와 라 마베라 연방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1973년 7월 14일 라 마베라 왕당파의 봉기와 웨스타시아의 개입으로 마베라 내전이 국제전으로 커진 것이 시작이었다. 같은 해 11월 사비에트가 유고랜드를 공격하면서 남부 전선이 열렸고, 1974년 4월에는 루이나가 체르드를 침공했다. 7월 북산이 청평을 침공해 청북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해협 동부까지 번졌다.
해협 북부와 남부에서는 연합국이 승리했다. 1976년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공산 정권이 차례로 무너졌고, 10월 2일 사비에트·동사랜드가 연합국과 오로아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북부와 남부의 전투가 끝났다. 그러나 동부의 청북전쟁은 교착 끝에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으로 마무리되었다. 1차 랜드 전쟁과 달리 하나의 강화조약은 없었으며, 전쟁은 전역마다 따로 끝났다.
양측을 합쳐 약 2,13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으로 해협을 사이에 둔 NLTO와 해르샤바 조약기구의 대치선이 확정되었고, 루이나는 연합국의 맹주로서 패권을 굳혔다. 그러나 루이나 국내에서는 전쟁의 상처가 검은 10년의 혼란을 키웠고, 청북전쟁의 띠에우리엔 대학살은 지금까지도 루이나 현대사의 가장 큰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전쟁은 한 곳에서 시작되어 차례로 번졌다. 1972~1973년 체르드와 라 마베라 연방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1973년 7월 14일 라 마베라 왕당파의 봉기와 웨스타시아의 개입으로 마베라 내전이 국제전으로 커진 것이 시작이었다. 같은 해 11월 사비에트가 유고랜드를 공격하면서 남부 전선이 열렸고, 1974년 4월에는 루이나가 체르드를 침공했다. 7월 북산이 청평을 침공해 청북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해협 동부까지 번졌다.
해협 북부와 남부에서는 연합국이 승리했다. 1976년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공산 정권이 차례로 무너졌고, 10월 2일 사비에트·동사랜드가 연합국과 오로아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북부와 남부의 전투가 끝났다. 그러나 동부의 청북전쟁은 교착 끝에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으로 마무리되었다. 1차 랜드 전쟁과 달리 하나의 강화조약은 없었으며, 전쟁은 전역마다 따로 끝났다.
양측을 합쳐 약 2,13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으로 해협을 사이에 둔 NLTO와 해르샤바 조약기구의 대치선이 확정되었고, 루이나는 연합국의 맹주로서 패권을 굳혔다. 그러나 루이나 국내에서는 전쟁의 상처가 검은 10년의 혼란을 키웠고, 청북전쟁의 띠에우리엔 대학살은 지금까지도 루이나 현대사의 가장 큰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2. 서론 [편집]
1963년 오로아 조약은 영토를 그대로 둔 채 동맹국의 군사력을 묶어 두는 방식으로 1차 랜드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1963~1965년 해협 남부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공산화되면서 해협을 사이에 둔 남북 대치가 굳어졌고, 1969년 NLTO 창설로 해협 북부의 진영도 제도화되었다. 1차 랜드 전쟁이 열강의 이권 전쟁이었다면, 그 뒤 10년 동안 랜드해협의 대립은 점점 체제와 이념의 대립으로 바뀌어 갔다.
오로아 조약은 1970년대 초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배상금 지급을 미루다 끝내 중단했고, 감시위원회의 사찰도 멈추었다. 조약 바깥에서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주고받은 비밀 양해, 곧 핵무기를 쓰지 않고 서로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만이 살아남은 확전 방지 장치였다.
2차 랜드 전쟁은 이 양해가 지켜진 채 벌어진 전쟁이었다.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유고랜드의 땅과 랜드해협의 바다에서 직접 맞붙었지만 끝까지 서로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았고 핵무기도 쓰지 않았다. 강대국이 제3국의 땅에서 싸우고 그 땅의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구조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나타났다.
오로아 조약은 1970년대 초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배상금 지급을 미루다 끝내 중단했고, 감시위원회의 사찰도 멈추었다. 조약 바깥에서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주고받은 비밀 양해, 곧 핵무기를 쓰지 않고 서로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만이 살아남은 확전 방지 장치였다.
2차 랜드 전쟁은 이 양해가 지켜진 채 벌어진 전쟁이었다.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유고랜드의 땅과 랜드해협의 바다에서 직접 맞붙었지만 끝까지 서로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았고 핵무기도 쓰지 않았다. 강대국이 제3국의 땅에서 싸우고 그 땅의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구조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나타났다.
3. 원인 [편집]
상세 내용은 2차 랜드 전쟁/배경 문서 참고.
가장 깊은 원인은 냉전 구도의 격화와 안보 딜레마였다. 해협 남부의 공산화 이후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는 공산 세력이 해협 북부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사활을 걸었고, 사비에트는 NLTO의 포위를 깨려 했다. 1970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해협 북부의 비공산 국가들에게도 루이나 패권에 대한 두려움을 심었고, 공산 세력에게는 '제국주의 침략'을 선전할 가장 좋은 근거가 되었다.
해상 교통로와 자원도 여전히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 콘스탄티노폴을 점령한 루이나가 포르틸락해협을 사실상 단독으로 통제하게 되자, 해협 이북의 내해에 갇힌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길을 루이나에 맡긴 처지가 되었다. 동부에서는 북산과 청평이 청북 해협의 통항과 국경 지대를 두고 충돌을 거듭했다.
마지막으로 국지전의 연쇄 확전이 전쟁을 키웠다. 마베라 내전과 북산·청평 분쟁은 본래 각각의 국지 분쟁이었지만, 진영별 동맹을 타고 차례로 강대국을 끌어들였다. 어느 한 나라도 랜드해협 전체의 전쟁을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4년 사이에 해협의 거의 모든 열강이 참전하는 전쟁이 되었다.
4. 발단 [편집]
상세 내용은 2차 랜드 전쟁/배경 문서 참고.
4.1. 혼란한 자유진영 [편집]
1960년대 후반 자유진영은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루이나는 1970년 5월 8일 '새벽 파수 작전'으로 콘스탄티노폴을 침공했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점령의 수렁에 빠졌고, 국내에서는 같은 해부터 극좌·극우 무장조직의 테러가 잇따르는 검은 10년이 시작되었다. 플로렌시아는 1965년 셀레스티아의 독립으로 식민제국을 잃은 뒤 경제 재편의 진통을 겪고 있었고, 웨스타시아는 요크의 군사독재 아래 있었다. 북산 역시 1966년 1.23 내란, 1967년 5.13 부정선거, 1969년 긴급조치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69년 출범한 NLTO 안에서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을 둘러싼 이견이 컸다. 자유진영의 결속이 흔들리는 사이, 해협 북부에서 NLTO에 가입하지 않은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는 루이나에 대한 반감과 좌파 세력이 함께 커지고 있었다.
1969년 출범한 NLTO 안에서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을 둘러싼 이견이 컸다. 자유진영의 결속이 흔들리는 사이, 해협 북부에서 NLTO에 가입하지 않은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는 루이나에 대한 반감과 좌파 세력이 함께 커지고 있었다.
4.2. 공산 진영 내의 정치적 불만 고조 [편집]
공산 진영도 하나로 뭉쳐 있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1964년 집권한 브레자코프 아래에서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을 관리하며 현상 유지와 평화 공존을 앞세웠다. 그러나 1960년 사비에트와 결별한 청평은 이를 수정주의라 비난했고, 1966년 문화대혁명과 1970년 려우 즈카이의 사망 이후 권력투쟁에 휩싸였다. 1963년 사비에트에서 떨어져 나온 동사랜드는 공산국가이면서도 사비에트와 거리를 두는 제3세력 노선을 걸었다.
해협 북부의 좌파 세력은 사비에트의 신중함에 불만을 품고 무장 혁명 노선으로 기울었다. 진영 안에서 주도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사비에트는 결국 북부의 혁명을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는 사비에트가 직접 전쟁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협 북부의 좌파 세력은 사비에트의 신중함에 불만을 품고 무장 혁명 노선으로 기울었다. 진영 안에서 주도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사비에트는 결국 북부의 혁명을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는 사비에트가 직접 전쟁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4.3. 마베라와 체르드의 공산화 [편집]
1차 랜드 전쟁에서 진 라 마베라에서는 배상 부담 속에 좌파 연립 정부가 들어섰으나, 이 정부는 1966년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상페드로 3세 국왕의 묵인 아래 들어선 군부 정권이 공산당을 불법화하자 좌파는 지하로 들어가 마베라 인민해방군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에 나섰다.
체르드에서는 1960년대 중반 정부의 좌파 탄압이 이어졌으나, 1970년 이웃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되자 반루이나 민족주의와 좌파 운동이 하나로 합쳐졌다. 1972년 11월 총파업과 좌파 장교들의 봉기가 겹친 11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고, 아르만 체르노프가 대통령에 올랐다.
1973년 4월 마베라 인민해방군은 수도 트리넬을 점령해 4월 혁명을 완수했다. 상페드로 3세는 남부로 피신했고, 마테오 콘티가 혁명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사비에트는 곧바로 혁명정부를 승인했으며, 5월 체르드와 라 마베라 혁명정부는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체르드에서는 1960년대 중반 정부의 좌파 탄압이 이어졌으나, 1970년 이웃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되자 반루이나 민족주의와 좌파 운동이 하나로 합쳐졌다. 1972년 11월 총파업과 좌파 장교들의 봉기가 겹친 11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고, 아르만 체르노프가 대통령에 올랐다.
1973년 4월 마베라 인민해방군은 수도 트리넬을 점령해 4월 혁명을 완수했다. 상페드로 3세는 남부로 피신했고, 마테오 콘티가 혁명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사비에트는 곧바로 혁명정부를 승인했으며, 5월 체르드와 라 마베라 혁명정부는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4.4. 북산과 청평의 지속적인 분쟁 [편집]
북산과 청평의 적대는 1929년 북산의 청평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청평이 독립을 되찾은 뒤에도 두 나라는 국경과 청북 해협을 두고 대립했고, 1957년 하쿠센 조약으로 북산이 루이나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대립은 진영 대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69년 3월 히노타니 교전은 두 나라의 국경 충돌이 언제든 전쟁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70년 려우 즈카이가 죽은 뒤 청평이 권력투쟁에 휩싸이자, 북산 군부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해협 북부에서 전쟁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북산은 루이나의 지원을 믿고 1974년 7월 25일 청평을 침공했다.
1970년 려우 즈카이가 죽은 뒤 청평이 권력투쟁에 휩싸이자, 북산 군부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해협 북부에서 전쟁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북산은 루이나의 지원을 믿고 1974년 7월 25일 청평을 침공했다.
5. 발발 과정 [편집]
5.1. 마베라 내전 [편집]
상세 내용은 마베라 내전 문서 참고.
1973년 7월 14일 남부와 서부의 왕당파 군대가 일제히 봉기했고, 같은 날 웨스타시아군이 왕당파 정부의 요청으로 국경을 넘었다. 웨스타시아는 라 마베라의 오랜 숙적이었지만, 요크 정권에게는 국경 너머의 공산 정권이 더 큰 위협이었다. 8월 체르드가 혁명정부를 돕기 위해 의용군을 보내고, 9월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이 왕당파 정부를 승인하면서 내전은 국제전이 되었다.
1974~1975년 전선은 혁명정부가 장악한 북부·수도권과 왕당파가 장악한 남부·서부 사이에서 교착되었다. 양측은 점령지에서 각각 혁명재판과 백색 테러를 벌였고, 수십만 명의 피란민이 웨스타시아와 플로렌시아로 넘어갔다.
1976년 3월 체르드가 무너지자 혁명정부는 고립되었다. 7월 18일 왕당파와 웨스타시아군이 트리넬을 함락했고, 콘티는 사비에트로 망명했다. 트리넬로 돌아온 상페드로 3세는 같은 해 가을 퇴위했고, 상페드로 4세가 즉위했다.
5.2. 루이나의 체르드 침공 [편집]
상세 내용은 루이나의 체르드 침공 문서 참고.
체르드는 라 마베라 혁명정부에 의용군을 보내는 한편, 루이나 점령 아래의 콘스탄티노폴에서 활동하던 무장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1974년 3월 체르드 포병이 콘스탄티노폴 외곽의 루이나군 기지를 포격하자, 데이븐포트 행정부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 4월 체르드 침공을 시작했다. 작전명은 북문 작전(Operation NORTH GATE)이었다.
루이나군은 남쪽 국경과 콘스탄티노폴 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했고, 5월에는 플로렌시아군이 서쪽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체르드군과 민병대는 산악지대와 도시에서 끈질기게 저항했고, 1975년 가을 루이나의 병력과 예산이 청북전쟁으로 옮겨 가면서 진격은 더뎌졌다.
1976년 3월 연합군이 수도 비셰나르를 함락하면서 체르노프 정권은 무너졌다. 체르노프는 사비에트로 망명했고,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5월 휴전에 합의했다. 9월 임시정부는 루이나·플로렌시아와 비셰나르 조약을 맺어 중립을 선언했다.
5.3. 청북전쟁 [편집]
상세 내용은 청북전쟁 문서 참고.
1974년 7월 25일 북산은 기갑부대의 돌파와 해안 진출, 수도 공수강습을 결합한 뇌우 작전으로 청평을 침공했다.[3] 초기 공세는 청평의 전방 지휘부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최종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1975년 4월 청평은 쑤옹안에서 북산군을 몰아내며 항전 의지를 되찾았다.
1975년 8월 27일 청북 해협에서 일어난 할리만 사건을 계기로 루이나는 9월 14일 직접 참전했다. 10월 3일 '은하의 문 작전'으로 대규모 폭격이 시작되었고, 10월 8일 '회색의 불꽃 작전'에 이어 10월 22일 연합군이 띠에우리엔을 점령했다. 점령 과정과 그 직후에 벌어진 띠에우리엔 대학살은 루이나 국내 여론을 뒤집어 놓았다.
이후 전선은 다시 교착되었고,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은 전투 중단과 잠정 정전관리선 운용, 점령지의 단계적 이양, 루이나 주도의 감시단 배치를 담았다. 청북전쟁의 끝은 곧 2차 랜드 전쟁 전체의 끝이었다.
6. 전쟁 당시 전황 [편집]
상세 내용은 2차 랜드 전쟁/전개 문서 참고.
1973년 - 7월 마베라 내전이 국제전이 된 뒤, 사비에트는 웨스타시아의 병력을 라 마베라에서 떼어 놓기 위해 11월 웨스타시아의 괴뢰국 유고랜드를 공격했다. 12월 루이나·플로렌시아 원정군이 유고랜드에 상륙하면서 1차 랜드 전쟁 이후 처음으로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군대가 직접 맞붙었다. 다만 두 나라는 서로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았다.
1974년 - 3월 사비에트는 '랜드해협의 안보에 이바지하겠다'며 NLTO 가입을 신청하는 평화 공세를 폈으나 거부되었고, 5월 14일 해협 남부의 공산국들과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출범시켰다. 같은 시기 루이나가 체르드를 침공했고, 7월에는 청북전쟁이 시작되었다. 10월에는 빌베른 해군이 사비에트 화물을 실은 동사랜드 선박을 나포한 일을 계기로 동사랜드가 참전해 동남 해역에서 빌베른과 싸웠다.
1975년 - 남부 전선에서 사비에트의 봄 공세가 실패하면서 유고랜드 전선은 교착되었다. 9월 루이나가 청북전쟁에 직접 참전하면서 루이나의 병력과 예산은 동부로 쏠렸고, 10월 띠에우리엔 대학살 이후 루이나의 참전 지지율은 9월 64%에서 12월 38%로 떨어졌다.
1976~1977년 - 3월 체르드, 7월 라 마베라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자 사비에트는 북부의 동맹을 모두 잃었다. 10월 2일 사비에트·동사랜드와 연합국은 중립국 델라웨어의 오로아에서 휴전협정을 맺었고,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으로 청북전쟁까지 끝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7. 연표 [편집]
시기 | 사건 |
1966년 | 라 마베라 군부 쿠데타, 좌파 정권 붕괴 |
1969년 4월 4일 | NLTO 창설 |
1970년 5월 8일 | 루이나, 콘스탄티노폴 침공 |
1972년 11월 | 체르드 11월 혁명 |
1973년 4월 | 라 마베라 4월 혁명 |
1973년 7월 14일 | 왕당파 봉기·웨스타시아 개입, 2차 랜드 전쟁 발발 |
1973년 11월 | 사비에트, 유고랜드 공격 |
1973년 12월 | 루이나·플로렌시아 원정군 유고랜드 상륙 |
1974년 3월 | 사비에트 NLTO 가입 신청 / 체르드의 콘스탄티노폴 포격 |
1974년 4월 | 루이나, 체르드 침공 (북문 작전) |
1974년 5월 14일 | 해르샤바 조약기구 창설 |
1974년 7월 25일 | 북산, 청평 침공 (청북전쟁 발발) |
1974년 10월 | 동사랜드 참전 |
1975년 4월 | 쑤옹안 전투 |
1975년 8월 27일 | 할리만 사건 |
1975년 9월 14일 | 루이나, 청북전쟁 직접 참전 |
1975년 10월 22일 | 띠에우리엔 점령, 띠에우리엔 대학살 |
1975년 11월 28일 | 루이나에서 10월 전선 결성 |
1976년 3월 | 비셰나르 함락, 체르노프 정권 붕괴 |
1976년 7월 18일 | 트리넬 함락, 라 마베라 혁명정부 붕괴 |
1976년 9월 | 비셰나르 조약, 체르드 중립 선언 |
1976년 10월 2일 | 오로아 휴전협정, 북부·남부 전역 종결 |
1977년 | 리처드 잭슨, 루이나 대통령 취임 |
1977년 7월 27일 | 바젤 정전협정, 2차 랜드 전쟁 종결 |
8. 주요 전선 [편집]
전선 | 기간 | 주요 교전국 | 결과 |
마베라 전선 | 1973~1976 | 왕당파·웨스타시아 대 혁명정부·체르드 | 왕정 복귀 |
체르드 전선 | 1974~1976 | 루이나·플로렌시아 대 체르드 | 체르드 중립화 |
남부 전선 | 1973~1976 | 웨스타시아·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 대 사비에트 | 전쟁 전 경계 회복 |
동부 전선 | 1974~1977 | 북산·루이나 대 청평 | 교착, 바젤 정전 |
동남 해역 | 1974~1976 | 빌베른 대 동사랜드·사비에트 | 휴전 |
바다에서는 전쟁 내내 루이나 해군이 우위를 지켰다. 콘스탄티노폴을 점령한 루이나가 포르틸락해협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비에트는 1차 랜드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해협 북부의 동맹국에 병력과 물자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9. 참전국 [편집]
상세 내용은 2차 랜드 전쟁/참전국 문서 참고.
9.1. 연합국 [편집]
- 루이나 - 연합국의 맹주. 체르드 침공을 주도하고 남부 전선과 청북전쟁에 참전했으며, 해상 작전 전반을 맡았다.
- 플로렌시아 - 연합국 최대의 병력을 동원해 체르드 전선과 남부 전선에서 싸웠다. 청북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 웨스타시아 - 라 마베라 왕당파를 도와 마베라 전선을 맡았고, 괴뢰국 유고랜드를 지켰다.
- 빌베른 - 동남 해역에서 동사랜드·사비에트 해군과 싸우고 남부 전선에 원정군을 보냈다.
- 북산 - 청북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 동부 전선의 주력이었다.
- 라 마베라 왕당파 정부 - 4월 혁명 뒤 남부로 피신한 상페드로 3세가 세운 정부로, 1976년 트리넬을 되찾았다.
9.2. 동맹국 [편집]
10. 피해와 전쟁범죄 [편집]
상세 내용은 띠에우리엔 대학살 문서 참고.
전쟁으로 연합국 쪽에서 약 315만 명, 동맹국 쪽에서 약 389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와 실종자를 합친 사상자는 약 2,130만 명에 이르렀다. 전투가 주로 라 마베라·체르드·유고랜드·청평의 땅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사망자 가운데 민간인의 비율이 1차 랜드 전쟁보다 훨씬 높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쟁범죄는 1975년 10월의 띠에우리엔 대학살이다. 시가전 동안 청평 당국이 사전 명부에 따라 벌인 처형, 점령 뒤 북산 국가경찰이 벌인 부역자 색출과 즉결처분, 그리고 시가전의 포격과 공습이 겹쳐 대규모 민간인 사망이 발생했다. 처형에 의한 사망만 2,000~8,000명으로 추정되며, 누구의 책임인지는 지금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마베라 내전에서는 양측 모두 점령지에서 보복을 벌였다. 혁명정부는 귀족과 성직자, 왕당파 협력자를 인민재판에 넘겼고, 왕당파는 수도를 되찾은 뒤 공산주의자와 그 가족을 색출하는 백색 테러를 벌였다. 체르드 전선에서는 비셰나르 포위전 동안의 시가지 포격이, 남부 전선에서는 사비에트 점령지 유고랜드 주민의 강제 동원이 큰 피해를 낳았다.
11. 전후 연합국 [편집]
상세 내용은 2차 랜드 전쟁/영향 문서 참고.
루이나는 연합국의 맹주로서 해협 북부의 질서를 사실상 혼자 설계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정반대였다. 띠에우리엔 대학살 이후 반전 여론이 들끓었고, 청북전쟁 제대군인과 반전 학생들이 1975년 11월 10월 전선을 결성하는 등 검은 10년의 폭력은 전쟁과 함께 정점으로 치달았다. 제대군인 문제와 전쟁 피로는 1970년대 후반 사회 불안의 큰 원인이 되었고, 1978년 군정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배경이 되었다.
플로렌시아는 연합국 최대의 병력을 보낸 대가로 다시 재정 부담을 떠안았다. 웨스타시아의 요크 정권은 숙적 라 마베라에 왕정을 되돌려 놓은 공로를 내세워 권력을 굳혔다. 북산은 바젤 정전협정에 따라 5년 동안 루이나의 감독 아래 군을 재편해야 했고, 이로써 루이나에 대한 북산의 의존은 더욱 깊어졌다.
12. 전후 동맹국 [편집]
사비에트는 북부의 동맹을 모두 잃었지만,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해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을 더 단단히 묶었다. 그러나 전쟁 중 미뤄 두었던 동사랜드와의 갈등은 휴전 직후 다시 불거져, 1977년 3월 2일 바익롱 섬 교전과 5월 동사랜드의 단교로 이어졌다. 동사랜드는 이후 다시 제3세력 노선으로 돌아갔다.
청평은 수도를 빼앗기고도 국가를 지켜 냈다. 바젤 정전협정으로 점령지를 단계적으로 돌려받았고, 1978년 정돈 회의를 거쳐 체제를 다시 세웠다. 옛 동맹국 체르드는 비셰나르 조약에 따라 중립국이 되었고, 라 마베라는 상페드로 4세 아래 왕국으로 돌아갔다. 두 나라의 공산당은 불법화되었고, 지도부는 사비에트로 망명했다.
청평은 수도를 빼앗기고도 국가를 지켜 냈다. 바젤 정전협정으로 점령지를 단계적으로 돌려받았고, 1978년 정돈 회의를 거쳐 체제를 다시 세웠다. 옛 동맹국 체르드는 비셰나르 조약에 따라 중립국이 되었고, 라 마베라는 상페드로 4세 아래 왕국으로 돌아갔다. 두 나라의 공산당은 불법화되었고, 지도부는 사비에트로 망명했다.
13. 영향 [편집]
2차 랜드 전쟁으로 랜드해협의 봉쇄선이 확정되었다. 해협 북부에는 루이나를 중심으로 한 NLTO가, 해협 남부에는 사비에트를 중심으로 한 해르샤바 조약기구가 자리 잡았고, 그 사이에 체르드·시스타니아·델라웨어 같은 북부 중립국들이 완충 지대를 이루었다. 이 구도는 2026년 현재까지 큰 틀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쟁은 내전성 분열의 씨앗도 남겼다. 라 마베라의 왕정 복귀는 혁명정부를 지지했던 지역과 계층의 원한을 남겼고, 왕정을 되찾아 준 웨스타시아와의 관계도 곧 다시 나빠져 1983년 마테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청평과 북산 사이의 정전관리선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두 나라 관계의 불씨로 남았다.
무엇보다 이 전쟁은 루이나 중심의 연합국 패권을 굳혔다. 루이나는 해협의 바다와 동맹 체제를 모두 쥐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국내에서는 전쟁의 상처와 정치 폭력, 그리고 군정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전쟁은 내전성 분열의 씨앗도 남겼다. 라 마베라의 왕정 복귀는 혁명정부를 지지했던 지역과 계층의 원한을 남겼고, 왕정을 되찾아 준 웨스타시아와의 관계도 곧 다시 나빠져 1983년 마테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청평과 북산 사이의 정전관리선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두 나라 관계의 불씨로 남았다.
무엇보다 이 전쟁은 루이나 중심의 연합국 패권을 굳혔다. 루이나는 해협의 바다와 동맹 체제를 모두 쥐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국내에서는 전쟁의 상처와 정치 폭력, 그리고 군정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14. 기타 [편집]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1963년 오로아 조약 바깥에서 주고받은 비밀 양해는 이 전쟁에서 끝까지 지켜졌다. 두 나라는 유고랜드와 바다에서 직접 교전하면서도 서로의 본토와 핵무기에는 손대지 않았는데, 양해의 존재가 공개된 뒤에야 이 '이상한 절제'의 이유가 설명되었다.
루이나의 곡물·식품 기업 윌리스 푸드는 전쟁 중 동맹국에 대한 금수 조치를 어기고 제3국을 거쳐 곡물을 팔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의혹은 전후 의회 청문회에서 다루어졌으나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루이나의 곡물·식품 기업 윌리스 푸드는 전쟁 중 동맹국에 대한 금수 조치를 어기고 제3국을 거쳐 곡물을 팔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의혹은 전후 의회 청문회에서 다루어졌으나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5. 여담 [편집]
'핫 워'라는 별칭은 전쟁 초기 플로렌시아 언론이 처음 쓴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이 더 이상 차갑지 않다는 뜻이었으며, 이후 루이나와 다른 연합국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1차와 2차 랜드 전쟁 모두에서 루이나의 적국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2차 랜드 전쟁 이후 체제가 바뀌면서 루이나와의 관계도 달라졌고, 라 마베라는 훗날 NLTO 회원국이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74년 3월 사비에트가 NLTO 가입을 신청한 일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진지한 제안이라기보다는 연합국의 결속을 흔들기 위한 선전 공세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1차와 2차 랜드 전쟁 모두에서 루이나의 적국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2차 랜드 전쟁 이후 체제가 바뀌면서 루이나와의 관계도 달라졌고, 라 마베라는 훗날 NLTO 회원국이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74년 3월 사비에트가 NLTO 가입을 신청한 일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진지한 제안이라기보다는 연합국의 결속을 흔들기 위한 선전 공세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6. 관련 어록 [편집]
"우리는 체르드를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폴에 있는 우리 젊은이들을 향한 포격을 멈추게 하러 가는 것입니다."토머스 데이븐포트, 1974년 4월 의회 연설
"사비에트 연방은 랜드해협의 안보에 이바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문을 닫는 쪽이 누구인지는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레오니트 브레자코프, 1974년 3월 NLTO 가입 신청 당시
"전쟁은 해협의 북쪽에서 끝났고, 동쪽에서 끝났고, 남쪽에서 끝났다. 그런데 벨포르의 거리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시사주간지 《코망테르》, 1977년 8월호 사설
17. 관련 인물 [편집]
- 토머스 데이븐포트 - 개전 당시 루이나 대통령
- 리처드 잭슨 - 종전 당시 루이나 대통령
- 자크 르몽 - 플로렌시아 총리
- 앨빈 카펜트리 요크 - 웨스타시아 연방대통령
- 알렉산드르 노바크 - 빌베른 대통령
- 오가미 잇토 - 북산 내각총리대신
- 상페드로 3세 - 라 마베라 국왕, 왕당파 정부 수반
- 레오니트 브레자코프 - 사비에트 서기장
- 류톈화 - 청평 황제
- 쩐 반 럼 - 동사랜드 국가평의회 위원장
- 아르만 체르노프 - 체르드 대통령
- 마테오 콘티 - 라 마베라 혁명정부 총리